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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7월11일 09:35 ( 금 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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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설명 :이 사찰은 육사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처음에는 정수암이라고 부렸으나 조선 고종 7년에 육사대사가 5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정수암을 개명하여 쌍계사라고 불려지고 있다.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되었다는 목불좌상이 있다

법당의 규모는 40평 정도이고, 오래된 불당과 탱화들이 있다.

산기슭 암석데서 솟아나는 맛 좋은 우물물이 있다. 안산시에서는 유일한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소재지 :대부출장소에서 방마머리 방향으로 2km 정도(안산시 대부북동 1058  /  Tel :886-2110)
건립일자:1689년(숙종 15년) 이전으로 추정
규모: 법당규모 40평정도  

"효자문"

설명: 효자 홍정희(洪貞羲) 선생은 조선후기인 1888년대 초 대부남동에서 태어난 이름 난
효자로서 본관은 남양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 (孝誠)이 지극하여 정성을 다해 봉양(奉養)했으며 그 뜻을 거슬리지 않았다.
  특히 부친께서 별세(別世)하자 그는 깊이 애통(哀痛)해 하며 묘소 앞에 자그마한 여막(廬幕)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3년동안 거처하였다.
 그는 육식(肉食)을 입에 대지않고 소찬(素饌)으로 일관했으며, 한번도 자신의 집에 내려오지 않는 등 선친(先親)의 묘소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효행 (孝行)과 마음가짐은 마침내 조정(朝廷)에 까지 알려져 고종(高宗) 30년(1893) 6월 효자 정문(旌門)이 이곳에 건립되고 만인의 귀감(龜鑑)으로서 표상(表賞)되었다
 

지정번호:안산시 향토유적 제19호
.소  재 지:안산시 대부남동 748번지
.시      대:조선후기
.규      모:
3.2×1.35m

"자선비"

설명 :  이찬(李燦) 선생은 한말(韓末)에서 1920년대 초까지 생존했던 이 고장의 덕망(德望) 높았던 재산가(財産家)·유지로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선생은 일찍이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나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만 해도 대부남동일원(一圓)의 토지는 거의 그의 소유라 할만큼 대지주(大地主) 였으며, 대부분의 농토(農土)는 많은 소작인(小作人)들에 의해 경작(耕作)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평소 마음이 소박하고 인정(人情)이 두터워 스스로 가난한 민중의 처지를 깊이 헤아려 일부의 땅은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빚과 소작료(小作料)를 탕감(蕩減)해 주는 등 범인(凡人)이면 생각할 수 없는 큰 덕량(德量)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이 별세하자 은혜(恩惠)를 입은 마을 사람들이 거향적(擧鄕的)으로 장례(葬禮)를 치르고 생전의 고마운 마음씨와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현 대부남4동에 위치한 선행의 묘소 앞에 자선비(慈善碑)를 건립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선생의 가세(家勢)와 후사(後嗣)가 영락(零落)되고, 비(碑)를 돌보는 이가 없어 자주 쓰러져 1980년 4월 5일 남1동, 남3동 중간 도로변 현재의 위치에 이건(移建)되었다.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20호
소재지 :안산시 대부남동 85-11
건립일자:조선후기
구조: (140×34.5×15cm)
자선비의 석재(石材)는 화강암이며, 대석(臺石)은 시멘트조로 건립되었다. 그 규모는 높이 140cm, 폭 34.5cm, 두께 15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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